페로제도 레스트는 소금이나 훈연 대신 서늘한 바닷바람으로 양고기와 생선을 발효·건조하는 방식이다. 이 글에서는 레스트의 뜻과 날씨가 맛을 좌우하는 이유에 대해 써보겠다. 레스트는 특정 요리의 이름이 아니라 고기와 생선이 바람 속에서 발효되며 반건조 상태에 이르는 과정과 맛을 가리킨다. 페로제도에서는 히알루르라는 통풍 창고와 북대서양의 기후를 식품 저장에 이용했다. 아래 본문에 자세히 기술하였으니 즐겁게 읽어주길 바란다.
페로제도 마을 사진을 보다 보면 집 처마 아래에 생선이 나란히 매달린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나무판 사이가 벌어진 작은 창고에는 양고기가 걸려 있기도 한다.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꾸민 장식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냉장고 없이 고기와 생선을 저장하던 생활 공간이었다.
이곳에서는 소금을 듬뿍 뿌리거나 연기를 피우는 대신 바람이 지나가도록 두었다. 고기와 생선은 서서히 수분을 잃는 동안 발효됐고, 처음과는 전혀 다른 향과 질감을 갖게 됐다. 이 방식을 페로어로 레스트(Ræst)라고 부른다.
그런데 레스트를 페로제도의 발효 고기 한 종류라고만 설명하면 조금 어긋난다. 레스트는 완성된 음식 하나의 이름이라기보다 발효와 건조가 진행된 상태, 그리고 그때 만들어지는 맛에 더 가까운 표현이다.

페로제도 가정집 처마 아래에서 바람에 말리는 생선
출처: EileenSanda / Wikimedia Commons
라이선스: CC BY-SA 3.0
레스트라는 말 뒤에는 여러 음식이 있다
생선을 레스트 방식으로 가공하면 레스투르 피스쿠르(ræstur fiskur), 즉 발효·반건조 생선이 된다. 주로 대구나 검정대구라고도 불리는 세이스를 이용하며, 대구류와 해덕도 사용한다.
양고기도 같은 원리로 가공한다. 발효가 진행된 반건조 양고기는 레스트키외트(ræstkjøt)라고 부른다. 이보다 건조가 더 진행돼 단단해진 양고기는 스케르피키외트(skerpikjøt)가 된다.
따라서 레스트와 스케르피키외트는 완전히 같은 뜻이 아니다. 레스트는 발효가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고기가 반쯤 마른 단계에 가깝고, 스케르피키외트는 그 단계를 지나 더 단단하게 건조된 양고기를 가리킨다.
이 차이를 모르고 보면 페로제도 레스트가 생선 음식인지 양고기 음식인지 혼란스러울 수 있다. 실제로는 두 재료 모두에 적용된 가공 방식이다.
소금을 넣지 않는 저장법이 가능했던 이유
생선이나 고기를 오래 보관한다고 하면 먼저 소금이 떠오른다. 하지만 페로제도의 전통적인 바람 건조 과정에는 소금을 사용하지 않았다. 고기와 생선을 그대로 바람에 노출해 수분을 줄이고 발효가 일어나도록 했다.
페로제도는 북대서양 한가운데 있는 섬 지역이다. 경작할 수 있는 땅이 많지 않았고 날씨가 거칠어 곡물을 안정적으로 생산하기도 어려웠다. 주민들은 바다에서 얻은 생선과 섬에서 기른 양을 중요한 식량으로 활용했다.
한 번에 잡거나 도축한 식재료를 모두 신선한 상태로 먹을 수는 없었다. 다음 어획이나 도축 때까지 남은 식량을 보관하려면 별도의 방법이 필요했다. 소금과 연료를 계속 소비하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은 섬을 끊임없이 통과하는 바람이었다.
2015년에 발표된 페로제도 발효 생선 연구에서도 과거에는 포유류 고기와 새, 생선을 소금 없이 바람에 말렸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가공한 생선은 계절과 날씨 때문에 식량 공급이 불안정할 때 꺼내 먹을 수 있는 저장 단백질이었다.
관련 연구: Ræstur fiskur: air-dried fermented fish the Faroese way
바람이 드나드는 식품 저장고 히알루르
양고기는 보통 히알루르(hjallur)라는 작은 목조 건물 안에 매단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창고지만 벽을 만드는 방식이 일반 창고와 다르다.
나무판을 빈틈없이 붙이지 않고 사이를 벌려 놓아 바깥 공기가 내부를 통과하게 만든다. 지붕은 비를 막아 주지만 벽 사이로는 바람이 계속 들어온다. 고기가 비에 젖지 않으면서도 밀폐되지 않는 구조다.
히알루르는 집 근처에 독립된 창고로 세워지기도 하고 주택에 붙어 있기도 한다. 특별한 기계가 들어 있는 시설은 아니지만, 고기를 아무 곳에나 걸어 두는 것과는 다르다. 비와 직사광선을 피하면서도 공기가 정체되지 않도록 만든 생활형 건조 시설이다.
생선은 히알루르 내부보다 집이나 창고의 처마 아래에 거는 경우가 많았다. 머리와 내장을 제거한 생선 두 마리를 꼬리 부분에서 한 쌍으로 묶은 뒤 지붕 아래에 매달았다. 비를 피하면서 바람을 직접 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페로제도 히알루르 안에 매달아 건조하는 양고기
출처: Erik Christensen / Wikimedia Commons
라이선스: CC BY-SA 3.0
바람이 강할수록 잘 마르는 것은 아니다
페로제도 레스트에서 가장 까다로운 부분은 날씨다. 바람이 세면 빨리 마를 것 같지만, 무조건 강한 바람이 좋은 것은 아니다.
기온이 높으면 고기가 제대로 발효되기 전에 상할 수 있다. 반대로 지나치게 추우면 발효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아 레스트 특유의 향이 약해진다. 바람이 너무 강하면 표면이 급하게 마르면서 원하는 맛이 형성되지 않을 수 있다.
습도가 높아져 생선에 수분이 다시 차는 것도 문제다. 발효와 건조가 중단되고 부패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페로제도에서 생선을 말리는 사람들은 날씨가 바뀌면 생선의 위치를 옮기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부분이 없는지 계속 확인했다.
공식 페로제도 관광 자료에서도 따뜻하면 상하고, 너무 추우면 발효가 멈추며, 바람이 지나치게 강하면 맛이 약해진다고 설명한다. 결국 레스트의 맛은 단순히 시간이 지나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온도와 습도, 풍속이 일정한 범위에서 맞아야 만들어진다.
관련 자료: Visit Faroe Islands – Faroese Food
양고기는 가을부터 천천히 변한다
페로제도의 양 도축은 전통적으로 가을에 이루어졌다.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하는 시기에 고기를 히알루르에 걸면 여름철보다 벌레가 생길 위험을 줄이면서 천천히 발효시킬 수 있었다.
처음 며칠 동안 고기는 표면의 수분을 잃으며 시들기 시작한다. 그다음 레스트 단계에 들어가면 미생물과 고기 자체의 효소가 맛과 향을 변화시킨다. 여기에서 더 오래 건조하면 단단한 스케르피키외트가 된다.
양고기가 완전히 건조되기까지는 일반적으로 5개월에서 9개월 정도가 걸린다. 하지만 달력만 보고 완성 시점을 정할 수는 없다. 같은 마을에서도 건조장의 위치와 바람이 들어오는 방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2023년 발효 양고기 연구는 레스트 생산에 양과 건조 시설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고기를 손질하는 기술과 적절한 바람·온도, 발효가 끝났는지 판단할 수 있는 경험까지 갖춰져야 한다.
관련 연구: Fermented mutton in the Faroe Islands
생선 레스트는 말린 뒤 삶아 먹는다
레스투르 피스쿠르는 건어물처럼 그대로 뜯어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전통적으로는 물에 넣고 삶은 뒤 뼈와 껍질을 제거해 먹었다.
별다른 향신료를 많이 넣지 않고 감자와 함께 내며, 양의 지방을 가공한 가르나탈그(garnatálg)를 곁들이기도 했다. 지방이 거의 없는 말린 생선에 양 지방을 함께 먹으면 맛뿐 아니라 열량도 보충할 수 있었다.
발효 생선은 한때 크리스마스이브와 새해 전날에 먹는 음식이기도 했다. 이후 덴마크식 음식이 명절 식탁에 들어오면서 예전보다 비중이 줄었지만, 레스투르 피스쿠르는 페로제도 가정식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북유럽 지역의 발효 생선이 축제나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으로 남은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페로제도에서는 냉동고가 보급된 뒤에도 발효 생선을 일상 음식으로 만들어 먹는 가정이 이어져 왔다.
냉동고가 생겼는데도 계속 말리는 이유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부터 페로제도 가정에도 냉동고가 보급됐다. 단순히 오래 보관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고기와 생선을 몇 달 동안 바람에 걸어 둘 필요가 줄어든 셈이다.
그런데 레스트는 사라지지 않았다. 저장 필요가 줄어든 자리에 레스트 특유의 맛과 가족의 제조 경험이 남았기 때문이다. 어느 위치에 고기를 걸어야 하는지, 날씨가 바뀌었을 때 무엇을 살펴야 하는지, 언제 먹기 좋은 상태가 되는지는 집에서 세대를 거쳐 전해졌다.
과거의 레스트 양고기가 농촌의 저장 식량이었다면 오늘날의 발효 양고기는 귀한 전통 음식에 가까워졌다. 얇게 썬 스케르피키외트를 빵 위에 올리거나, 레스트키외트를 삶아 가족 식사에 내놓기도 한다.
바람 건조가 계속되는 이유는 옛날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데만 있지 않다. 냉동으로는 만들 수 없는 향과 질감이 있고, 그 맛을 알아보는 것 자체가 페로제도 사람들의 음식문화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날씨를 재료로 사용한 음식
레스트에는 눈에 보이는 양념이 거의 없다. 대신 고기의 상태와 바람, 온도, 습도, 미생물, 기다리는 시간이 맛을 결정한다. 그중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페로제도 레스트를 자연적으로 알아서 완성되는 음식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자연환경을 이용하지만 사람이 계속 상태를 살피고 개입해야 하는 저장 방식이다. 잘못된 기온과 습도에서는 부패 위험이 있으므로 일반 가정에서 단순히 고기나 생선을 걸어 두는 방식으로 따라 해서도 안 된다.
북대서양의 바람은 페로제도 주민들에게 늘 견뎌야 하는 날씨였지만, 동시에 식량을 보존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기도 했다. 레스트는 그 바람을 피하지 않고 식품 저장에 끌어들여 만든 페로제도만의 발효 문화다.